위빠사나 명상

     

     

    위파사나(위빠사나, 위빠싸나, Vipassanā, विपश्यना, , Vipaśyanā) 또는 관(觀) 으로도 불리며 우리나라에서는 비파사나(毘婆舍那), 비바사나(毘婆舍那), 비발사나(毘鉢舍那) 로 불리기도 했다.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에서는 위빠사나는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에서 행해지던 명상 또는 수행법이라고 주석에 설명되어 있고 대승아비 달마잡집론 주석에서는 사마타와 비발사나가 요가의 방법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위빠사나를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주변과 내면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 차리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아 발견의 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삶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모습을 띠게 된다고 한다. 

     

    1.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위빠사나는 당신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마음 수행의 한 양식이다. 당신은 난생 처음으로 당신 자신과 주변과 내면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아 발견의 한 과정으로, 자신의 체험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관찰하는 일종의 참여 연구다.

     

    이 수행을 접할 때의 마음가짐은, "내가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접어두고, 이론과 편견과 고정관념 따위는 잊어버리는 것, "," 혹은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살아있음의 이 체험이 무엇인지를 알며, 삶의 심오하고 참된 성질을 이해하고자 하면서도, 다른 누군가의 설명을 그냥 덥석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혼자 힘으로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로 명상 수행을 한다면,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 당신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것이 존재하는 바 그대로, 순간순간 변화하고 흘러가는 것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삶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은 체험해봐야지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태다.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이 특별한 방식을 연마한다. 우리는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는데, 이 특별한 유형의 인식이 소위 알아차림이다.

     

    이 알아차림 과정은 우리의 일상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 앞에 있는 그대로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사고와 개념이라는 장막을 통해 삶을 보면서, 마음의 대상에 불과한 이것들을 실제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사고의 흐름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우리는 실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흘려보내고 만다. 우리는 행위에 몰두하고 끊임없이 쾌락과 욕망을 충족시키고 고통과 불쾌감에서 도피하는 데 우리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기분을 좀 더 낫게 하고 두려움을 묻어버리는 데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허비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안전을 추구한다. 그러는 동안 실재 체험의 세계는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좀 더 안락해지려는 끊임없는 충동을 무시하고 대신 실재 속으로 뛰어들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킨다. 역설은, 참된 평화는 그것을 쫓기를 그만둘 때만 찾아온다는 것이다.

     

    2. 경험을 대하는 일상적 방식: 개념적 인식 - 단순 반작용

     

    우리 인간의 인식 습관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히 어리석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받아들이는 감각 자극 가운데 99퍼센트는 무시해버리고, 그 나머지 1퍼센트만을 불연속적인 사고 대상으로 고정화한다. 그런 다음에는 이미 내재화된 습관으로 이 사고 대상물에 반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평화로운 밤, 당신은 적막 속에 홀로 앉아있다. 그 때 멀리서 개 한 마리가 짖어댄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다. 그 적막의 바다로부터 음파의 진동이 넘실거리며 당신에게 달려온다. 당신에게 그 컹컹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것은 당신의 신경계 내에서 반짝이는 전자기 자극으로 바뀐다. 이 과정은 무상성과 불만족성과 무아성의 한 체험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은 전혀 딴판이다.

     

    대신 우리는 이 인식을 사고 대상으로 고정화하여 거기에 심상을 덧붙인 다음, 일련의 정서적이고 개념적인 반응들을 보이기 시작한다.

     

    "저 개가 또 시작이군. 저 녀석은 밤이면 항상 짖어대. 성가셔 죽겠어. 밤마다 정말 짜증나게 하는 녀석이야. 누가 나서서 조치를 취하든지 해야지 원. 아무래도 내가 경찰을 불러야겠어.. 아니지, 개장수가 낫겠어. 개 수용소에다 전화를 하는 거야. 아니지, 개 주인 녀석한테 욕을 잔뜩 써대는 거야. 정말 골칫거리야. , 아니야, 그냥 귀마개를 하는 게 낫겠어."

    이런 것은 단지 인식상의 사고 습관에 불과하다. 당신은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의 인식 습관을 따라 함으로써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법을 배워왔다. 이런 인식 반응은 신경계 속에 본래부터 담겨 있던 게 아니다. 거기에는 회로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 장치가 꼭 이런 방식으로 쓰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습득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그 첫 단계가 당신이 뭔가를 하는 동안, 한 걸음 물러서서 가만히 자신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깨닫는 것이다.

     

    3.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

     

    위빠사나 명상법은 우리의 인식 과정을 대단히 정밀하게 살펴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 떠오르는 사고와 인식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자극들에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차분하면서도 명확하게 관조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되면 반응 자체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또 생각이 갖기 마련인 그 강박적 성격도 서서히 사라진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결혼한 채일 테고 달려오는 트럭을 보면 옆으로 비켜서겠지만, 이제 그 '마음이 지옥'인 상태를 겪을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의 강박성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현실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패러다임의 완벽한 전환으로 인식 메커니즘이 전면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강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환희와 함께 찾아온다. 이 때문에 불교는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는 걸 삶을 보는 옳은 시각이라 여기는데, 불교 문헌들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식이라고 일컫는다. 위빠사나 명상은 이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점차로 얻게 해주는 일련의 수행 과정이다탐욕을 예로 들어보자. 탐욕 상태가 지속되면 예속과 비탄을 불러오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탐욕 상태든 길어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 밖으로 집어던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머무르도록 조장하는 것은 그만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이 오고 가도록 놔둔다. 탐욕이 열린 집중으로 처음 눈에 띄면 어떤 가치판단도 내리지 마라. 그냥 뒤로 물러나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라. 이런 식으로 그 탐욕의 전체 동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관찰하는 것이다. 우린 전혀 그것을 돕거나 가로막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은 머물 만큼 머문다. 그리고 그것이 거기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배울 만큼 배운다.

    우리는 탐욕이 무엇을 하고, 우리를 어떻게 괴롭히며, 남들에게는 어떻게 부담을 주는지 지켜본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끝없는 불만족의 상태,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갈망 상태에 놓이게 하는지 알아차린다. 이런 직접 체험으로부터 탐욕은 삶을 영위하는 미숙한 방법에 불과하다는 걸 뼛속 깊이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론 따위가 전혀 없는 깨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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